「SPACE(공간)」 2024년 10월호 (통권 683호)
9월 4일부터 7일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프리즈 서울이 개최됐다. 아트 바젤과 함께 세계 양대 아트 페어로 꼽히는 프리즈는 2003년 런던에서 시작해, 뉴욕(2012), 로스앤젤레스(2019), 서울(2022)로 개최 도시를 확장해왔다. 1~2회 때 그랬듯 이번에도 프리즈 서울은 화제의 중심에 있다. 미술 전문지나 라이프스타일 매거진을 비롯해 일간지 문화면까지 여러 매체에서 주목하는 프리즈는 회차를 거듭할수록 도시적 스케일의 이벤트가 되어가고 있다. 프리즈(frieze)라는 고전 건축 용어가 서울의 미술 신을 들썩이게 하는 이 흥미로운 현상을 살펴봤다.

방콕에서 참가한 SAC 갤러리 설치 전경, Image courtesy of Frieze, Lets Studio / ©Lets Studio

인도에서 온 DAG 갤러리 부스. 각 부스가 공간을 분할하는 방식을 살펴보는 것도 아트 페어의 재미 중 하나다. Image courtesy of Frieze, Lets Studio / ©Lets Studio
컨벤션 센터 내부의 풍경
아트 페어와 비엔날레는 어떤 이유에서든 지금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작품들을 한 공간에 집중시킨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하지만 동일한 오브제도 비엔날레에 출품되면 감상의 대상이 되고, 아트 페어에 나오면 거래를 기다리는 상품이 된다. 작품과 상품의 원론적인 구분은 두 행사의 공간 경험을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미술 전문지 「아트포럼」과의 인터뷰에서 매튜 슬로토버(프리즈 공동창립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비엔날레에서는 “사물들 간에 모종의 관계”가 존재하는 반면, 아트 페어에서는 “함께 보여질 의도가 전혀 없었던 2,000~3,000개의 사물들”이 한데 모인다는 것이다. 요컨대 아트 페어에는 큐레이션이 없다는 뜻이다. 아트 페어에서 큐레이션을 수행하는 이는 방문자다. 내가 소유하고 싶은 물건을 선택하고 구매하는 행위 자체가 사적 큐레이팅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설령 구매에 뜻이 없다 해도, 페어장을 찾은 사람들은 자신의 관심사나 취향에 따라 이 거대한 상품 더미 속에서 크고 작은 발견을 하고, 자기만의 의미를 엮어나간다.

이와사키 다카히로, ‘텍토닉 모델: 페터 춤토르의 『분위기』’, 2024, 책, 40.3×35.3×13.5cm, Image courtesy of ANOMALY / ©︎Takahiro Iwasaki

아눔, ‘펠리놉시스 오’, 2024, 린넨에 유화, 50.5×75cm, Image courtesy of Yeo Workshop
프리즈 서울 첫 회부터 참여해온 일본의 아노말리 갤러리는 이와사키 다카히로의 작품을 처음 소개했다. 국내에서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다.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이와사키는 원폭 돔을 보고 자라면서 대형 구조물의 건설과 해체에 주목해왔다. 이러한 관심이 가장 독특한 방식으로 나타난 작품이 부스에 걸려 있던 ‘텍토닉 모델: 페터 춤토르의 『분위기』’(2024)다. 투명 아크릴 박스 속에 페터 춤토르의 『분위기』 원서를 집어넣고, 책의 머리 부분에 갈피끈으로 만든 작은 타워 크레인을 부착해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는 거장의 건축 서적을 일종의 건설 현장으로 돌려놓았다. 『분위기』는 재개발을 위해 해체되는 중일까, 아니면 증축되는 중일까. 프랑스의 조슬린 울프 갤러리는 이사 멜스하이머의 과슈 소품 세 점 ‘Nr 384’, ‘Nr 393’, ‘Nr 398’ (2015)을 선보였다. 작년 독일 갤러리 에스터 쉬퍼 부스를 통해 출품했을 땐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작가다. 건축양식사에 대한 깊은 이해를 기반으로, ‘망각되거나 등한시된 건물’의 ‘고고학자’를 자처하는 멜스하이머는 기시감 있는 콘크리트 구조물을 재현하면서도 참조한 건물의 출처에 대해 함구해 상상력을 자극한다. 일각에서는 인간이 부재하는 건조 환경을 통해 ‘포스트-휴먼’ 세계의 풍경을 그려 보인다고도 설명한다. 한편 건축 구조의 생략을 통해 독특한 효과를 창출하는 작가도 있다. 싱가포르의 갤러리 여 워크숍은 아눔의 ‘Phalaenopsis O’(2024)를 소개했다. 사실주의적 정물화와 기하학적 형태 연구를 병치시킨 두폭화 연작이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눔의 또 다른 작품 ‘티’(2024)와의 비교가 요긴하다. 싱가포르 특유의 페라나칸 건축양식을 재현한 ‘티’에서도 구상과 추상이 병존하고 있지만, 건축적 구조가 둘을 매개해주고 있다. 벽면과 바닥은 추상적인 패턴으로 채우고, 방 안의 남자는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식이다. 여기에서 건축적 구조를 걷어내고 정물화와 추상 패턴을 연접시켜 놓은 것이 아눔이 최근 시도하고 있는 두폭화 연작이다. 아눔은 말레이시아에서 건축을 전공한 후 독일로 이주해 화가가 된 인물로, 샤메인 콕(여 워크숍 실장)은 그가 고대 로마 건축 서적을 탐독하는 점을 주요하게 언급하기도 했다.

코사쿠 카네치카 갤러리 부스, Image courtesy of Frieze, Lets Studio / ©Lets Studio

"야외 극장 역할"이 극대화 된 이화여자대학교 캠퍼스 밸리, Image courtesy of EMAP
프리즈 서울 2024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또 다른 경향은 작품이 보여지는 방식에 현역 건축가가 개입할 때, 명료한 공간적 질서를 부여하기보다는 모호함이나 착시를 일으키고자 한다는 점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두 사례가 서을호(서아키텍츠건축사사무소 대표)의 올레드 프로젝트와 고사쿠 가네치카의 부스다. 친형인 작가 서도호와 함께 부친인 작가 서세옥에게 헌정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서을호는 전시장 입구부터 뒤편까지 한눈에 투과해 볼 수 있도록 작품을 겹겹이 배치해 감상자가 작품과 일체화되는 공간을 구현했다. 투명 천과 투명 올레드 사이에 열어놓은 “사이 공간”에 관람객이 진입하면 마치 서세옥이 화폭에 담았던 움직이는 사람들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코사쿠 카네치카 갤러리는 이시다 겐타로(KIAS 대표)에게 부스 디자인을 의뢰해 일본인 작가 구와타 다쿠로와 미국인 작가 댄 맥카시의 세라믹 작품을 마치 한 사람의 작업처럼 여겨지게 했다. 이시다는 유약을 사용하는 방식을 비롯해 두 작가의 ‘기법적 유사성’에 주목했다고 설명했다. 미세한 차이를 확대해 상품의 변별성을 강조하는 것이 세일즈와 마케팅의 기본이다. 이시다의 공간 설계는 두 작가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부각시키는 대신 얼버무리고 지워내는 방식으로 세일즈의 기본 원칙을 뒤집어보게 만든다.

이사 멜스하이머, ‘Nr 384’, 2015, 종이에 과슈, 24×17cm, Image courtesy of Isa Melsheimer, Galerie Jocelyn Wolff
바깥의 풍경
나흘간 열리는 프리즈 서울을 전후로 서울의 미술 신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 된다. 윤원화(시각 문화 연구자)의 관찰은 프리즈 주간에 서울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잘 보여준다. “프리즈 주간(9월 첫째주)에 서울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이벤트는 프리즈를 염두에 두고 기획되기 때문에, 그걸 피해 다닐 방법도 없습니다. (…) 사람들의 흐름이 바뀌니까, 동네 자체의 분위기나 인상이 달라집니다. 일시적으로 장소성이 바뀌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습니다. 물론 행사가 끝나면 그 공기는 사라집니다.” 이때 장소성이 바뀌는 정도나 양상은 각각의 전시 공간이 지닌 공간적 특성에 따라 달라진다. 지하 전시 공간을 거대한 저택으로 탈바꿈한 리움미술관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2024 아트스펙트럼 단체전 <드림 스크린>의 예술감독 리크리트 티라바닛은 리움미술관 그라운드갤러리를 20여 개의 방과 마당, 입구, 복도를 갖춘 공간으로 바꿔놓았다. 티라바닛이 참조한 윈체스터 하우스는 총기 사업으로 부를 일군 윈체스터 가문이 총기로 사망한 이들의 영혼을 따돌리기 위해 만든 미로형 집이다. 리움미술관은 이 공간의 복잡한 동선이 동시대인의 방향성 상실과 고립감을 나타낸 것이라 설명했는데, 끊임없이 밀려 들어오는 사람들로 빽빽하게 메워질수록 공간의 불가해성과 폐쇄성은 더 극대화됐다. 특히 이곳에서 보았던 사람들을 페이스 갤러리 앞의 긴 줄이나 경리단길의 작은 갤러리에서 다시 마주쳤을 땐 이태원 자체가 방향을 상실한 자들의 거대한 미로로 변한 듯했다.

리움미술관 <드림 스크린> 전시 전경, Image courtesy of Leeum / ©Kim Yeonjae
작년까지 프리즈 주간은 한남, 삼청, 청담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올해는 여기에 을지로가 합류했다. 미술 월간지 「더아트뉴스페이퍼」 프리즈 서울 특별판은 을지로를 ‘대안적인 정체성’을 지닌 전시 공간 밀집 구역으로 소개하며, 이 공간들이 “예상을 벗어난 장소에 위치해 있어 현지인도 찾기가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을지로의 골목길은 복잡하게 얽혀 있고, 특히 전시 공간은 건물 꼭대기나 후미진 구석에 위치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프리즈에 맞춰 을지로의 전시 공간을 늦은 시간까지 개방한 ‘을지 나이트’(2일)의 상황은 평소와 달랐다. 예술과 관련된 잡담을 나누면서 어딘가로 이동하는 사람들을 따라다니기만 해도 전시 공간을 찾아 들어갈 수 있었다. 사람들의 흐름이 을지로의 전시 공간 간의 연결성을 강화해준 셈이다. 을지로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시 공간인 공간형은 지상 5층 규모의 근린생활시설을 한국인 작가의 작품으로 채워 넣어, 어느 큐레이터의 표현처럼 위아래로 층을 이동할 때마다 “한국 미술의 독특한 단면”을 가로지르는 것과 같았다.

서을호, 서도호 형제의 올레드 프로젝트 전시 전경, Image courtesy of LG Electronics
대학의 참여는 이번 프리즈 주간이 보여준 또 다른 새로움이다.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은 프리즈와 협업해 <우주를 엮는 모든 것들, 그 양자적 관계에 대하여>를 개최했다. 작년까지 통의동, 안국동, 인사동의 독립·비영리 예술 공간에서 진행됐던 프리즈 필름 프로그램이 올해는 대학 캠퍼스로 무대를 옮긴 것이다. 캠퍼스 일대에 15개의 스크린을 뿌려놓듯 설치해 현역 작가와 학생의 작품을 상영했다. 이화 캠퍼스 복합단지(ECC)의 설계자 도미니크 페로가 언급했던 캠퍼스 밸리의 ‘야외 극장 역할’(「SPACE(공간)」 487호 참고)이 캠퍼스 일대로 확장된 셈이다. 다만 캠퍼스 공간의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작업과 병행하여 지식 생산의 가능성을 더 적극적으로 탐구했다면 더 풍성한 프로그램이 되었을 것이다. 예컨대 AA 스쿨이 바젤대학교 사회과학대학원과 함께 운영하고 있는 아트 바젤 방문학교 프로그램은 대학만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이들의 목적은 견학보다는 인류학자의 필드워크에 가까워서 건축가, 큐레이터, 사회과학자로 구성된 교강사의 인솔 아래 학생들은 현대미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아트 페어로 꼽히는 아트 바젤에 대해 비판적 분석을 수행한다. 예를 들면 아트 바젤이 ‘도시 속의 도시’에 머물지 않고 기존의 도시 조직에 더 사려 깊고 섬세한 방식으로 통합될 수 있는 방안을 도출해보는 식이다.

회화 작품을 살펴보고 있는 프리즈 서울 2024의 방문객, Image courtesy of Frieze, Lets Studio / ©Lets Studio

을지로 공간형 전시 전경, 3층, Image courtesy of artspaceHYEONG / ©Xunguuk Jang
서두에서 언급한 「아트포럼」과의 인터뷰에서 슬로토버는 프리즈가 산업박람회보다는 축제 같은 행사를 지향한다고 설명했다. 프리즈의 원조라 할 프리즈 런던이 프리즈 서울과 달리 이른바 마이스(MICE) 시설에서 개최되지 않는 이유다. 프리즈 런던은 매년 건축가와 협업해 런던의 공원인 리젠트 파크에 아트 페어를 위한 임시구조물을 짓는다. 2000년대에는 데이비드 아자예, 제이미 포버트, 카루소 세인트 존, 2010년대에는 카모디 그로아크, 바버 오스거비, 안나벨레 젤도르프, 그리고 올해는 어 스튜디오 비트윈이 천막 구조물을 설계했다. 물론 건축가와 협업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산업박람회의 틀이 벗겨지는 것도 아니고, 축제 분위기가 저절로 일어나는 것도 아닐 테다. 하지만 코엑스처럼 컨벤션 센터의 전형에 충실한 공간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새로움을 프리즈 런던은 제공한다. 프리즈 주간 동안 서울의 예술 공간은 각자의 크고 작은 공간적 자산을 이용해 동네의 공기를 바꾸고, 축제 기분에 들뜬 사람들을 맞이했다. 프리즈 서울의 부대 프로그램이 보여준 축제의 기술은 언젠가 프리즈 서울을 박람회장 밖으로 불러내지 않을까?

<드림 스크린> 전시를 위한 리움미술관 그라운드갤러리 도면, Image courtesy of Leeum
▲ SPACE, 스페이스, 공간
ⓒ VMSPAC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