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건축가 이일훈[이일훈건축연구소 후리(逅理) 대표]이 향년 6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78년 한양대학교 건축과를 졸업한 그는 김중업건축연구소에서 실무를 익혔다. 1984년 결성된 건축평론동우회의 초대회장을 맡는 등 비평가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모형 속을 걷다』(2005),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2011), 『제가 살고 싶은 집은』(2012), 『이일훈의 상상어장』(2017) 등 여러 저서와 기고를 통해 폭넓은 저술 활동을 해왔다. 사람과 삶, 그리고 자연에 대한 진솔한 이해 속에서 위로와 희망을 건네는 이일훈의 태도는 그의 말과 글, 건축에서 다르지 않았다. 건축 매체에 몸담고 오랫동안 이일훈과 교류해왔던 정귀원이 그의 건축을 소개한다.

잔서완석루의 여름 ⓒChin Hyosook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나요?
건축가 이일훈이 경기도 남양주에 설계한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2007)는 살기의 방식부터 집을 지을 때 살펴야 하는 것들을 주제로 건축주와 오랜 시간 소통하며 얻어낸 결과물이다. 전자우편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어떤 집을 꿈꾸고 있냐는 건축가의 첫 물음에 바람이 잘 통하는 집이면 좋겠다는 건축주의 대답이 있었고, 바람이 잘 통하려면 채를 나눠야 한다는 건축가의 권유에 건축주는 기쁨으로 화답했다. 그러기를 2년 6개월. ‘낡은 책과 다듬지 않은 돌로 지은 집’이란 이름답게 거실 상부의 공중 서가, 둥근 천장을 가진 서재, 작은 서재, 책의 길이라 명명된 복도 서가 등을 품은 집이 마침내 노출콘크리트와 스플릿블록으로 마감되어 묵직하게 앉았다. 동서남북으로 마련된 1층 툇마루, 2층의 내·외부 마당, 1층과 2층을 길게 늘여 잇는 길 같은 요소가 사용자를 부지런히 움직이게 만드는 집이다. 이후 소소한 일상 얘기가 따뜻하게 버무려진 소통의 과정은 책 『제가 살고 싶은 집은』(이일훈·송승훈 공저, 2012)으로 묶여 또 다른 인연을 만들어냈다. 김해주택 높은재(2016)와 나주주택-요와(凹窩, 2017)의 건축주들도 그 인연 가운데 있었다. 두 집 또한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나요?”란 건축가의 물음으로 시작됐음은 요와의 집짓기 과정을 기록한 영상 첫머리 “집을 짓는 시간이 내 삶의 방식을 고민하는 시간”이었음을 고백하는 집주인의 독백에서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잔서완석루의 야경 ⓒChin Hyosook
잔서완석루의 밖에 살기, 툇마루 ⓒChin Hyosook

잔서완석루의 심장부인 둥근 천장을 가진 서재 ⓒChin Hyosook

잔서완석루의 공중서가에서 내려다 본 거실 ⓒChin Hyosook
설계방법론 ‘채나눔’
비록 여러 채로 집을 나누진 않았지만, 잔서완석루는 이일훈의 설계방법론 ‘채나눔’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채나눔의 목적이 햇볕 잘 들고 바람 잘 통하는 건강한 집을 제공하는 데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채나눔은 불편하게 살기, 밖에 살기, (동선) 늘려 살기를 근간으로 하는데 그 근간을 살펴보면 좀 더 명백해진다.
우선 불편하게 살기는 우리 삶의 태도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됐다. 건축가는 맹목적으로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이 불편하게 살면 환경문제가 일단 없어지고 인간이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밖에 살기는 공간의 사용 방식과 관련 있다. 전통 건축의 특징은 내부 공간이 아닌, 마당과 마루 중심의 외부 공간에 있으며 외부를 중요하게 보자는 것은 인간의 삶에서 자연을 회복하자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늘려 살기는 시간에 관한 것이다. 짧은 동선이 합리적이라는 근대건축의 슬로건에 반대하여 좀 불편하더라도 좁은 집일수록 이동 거리를 길게 하여 움직이는 시간을 늘려보자는 제안이다.
이러한 설계방법론은 탄현재(1993)를 시작으로 궁리채(1993), 퇴계불이(1995), 가가불이(街家不二, 1996), 재색불이(材色不二, 1996) 등과 같은 1990년대 이일훈의 주택 프로젝트에 변주·적용되어 있다. 『모형 속을 걷다』(2005)에 나오는 실현되지 못한 프로젝트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불편의 건축
자비의 침묵 수도원(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자의 모후 신학원, 1994/2010 신관 증축)은 주택 설계를 통해 채나눔을 펼쳐 보인 건축가가 규모나 용도에 관계없이 어떤 건축에나 가능한, 즉 그것의 범용적 적용을 염두에 두고 있을 때 만난 프로젝트이다. 불편하게 살기를 제안하는 데 학생 수사들이 공부하고 생활하는 수련 공간만큼 적합한 곳도 없었을 것이다. 수사들의 이해와 동의 아래 그는 곧 수도원 본당과 작은 경당을 분리했다. 한 사람 지나기에도 어려운 좁고 어두운 복도와 공동화장실을 제안했다. 난간이 없는 외부 계단을 만들고 경당 바닥에는 콩자갈을 박았다. 불편한 집은 수도자들의 나태함을 경계하고 ‘겸손의 복도’는 일상적인 조심스러움과 양보를 통해 겸손을 자연스럽게 배어나오게 한다는 이유에서다.

자비의 침묵 수도원 본관 전경 ⓒChin Hyosook

자비의 침묵 수도원. 별채로 계획된 경당의 전경 ⓒChin Hyosook

자비의 침묵 수도원의 하늘성당으로 오르는 난간 없는 계단. 안쪽 벽면의 난간은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다. ⓒChin Hyosook

겸손의 복도 ⓒChin Hyosook
자비의 침묵 수도원 설계 이후 이일훈은 주어진 조건에 따라 설계방법론을 건물과 엮어내거나 사용자들로부터 결정적 단서를 찾는 방식으로 자신의 성당 건축을 꾸준히 진화시켜왔다. 충북 음성군 시골 마을의 생극성당(2003)은 앞마당을 사이에 두고 따로따로 앉은 본당과 사제관의 분절된 파사드가 인상적이다. 채나눔이 주는 통풍과 채광의 효율성은 물론 그것의 정신에 공감하게 된 본당 신부의 전폭적인 지지로 하늘과 빛을 가득 담은 성당을 완성할 수 있었다. 반면 경기도 이천시의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성 안드레아 신경정신병원 성당(2005)은 수도자뿐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환우들의 성당인만큼 주제가 소통이었다. 건축가는 이 주제를 어떻게 담백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제대 뒤 벽면 전체를 과감하게 투명 유리로 마감함으로써 환우들이 자연과 조우하고 세상과 소통하기를 바랐다.

성 안드레아 신경정신병원 성당. 바깥 풍경을 끌어들이는 제대 뒤 유리벽. ⓒChin Hyosook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면형의 집 성당(2013)과 본원 성당(2015)은 이일훈의 2010년대 작업이다. 전자가 피정의 집 부속 성당답게 수도자뿐 아니라 피정객과 지역 주민들의 사용이 고려됐다면, 후자는 수도자의 집이면서 도심지 본원으로서의 위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고 보면 수도회의 은인 허마리아의 묘비(1992), 수사들이 이끄는 복지시설 나루터 공동체의 수도원과 작업장(1999)을 설계한 바 있으니, 그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의 인연은 꽤 깊다고 할 수 있겠다.

면형의 집 성당은 외벽 마감 재료로 제주석을 활용하고, 성당 내부 공간은 지면 아래로 끌어내려 보다 경건한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했다. 원래 계획처럼 지면 아래 깊이 박힌 성당은 구현되지 못했으나, 신자들은 성당 안으로 진입할 때 땅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느낌을 갖게 된다. ⓒChin Hyosook

진입부 기둥과 기둥 사이 제주석 돌쌓기는 아예 제주 토박이 돌담 기술자를 불러 들여 쌓았다. ⓒChin Hyosook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건축가가 직접 디자인한 역삼각형 모양의 제대가 눈에 띈다. ⓒChin Hyosook
희망과 위로의 건축
자비의 침묵 수도원 건립 당시 수도회 측 건축 담당은 서영남 수사였다. 이후 수도원을 떠난 그는 민들레국수집을 비롯해 가난한 이들과 노숙인을 위한 여러 공간을 조성하여 나눔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 작지만 의미 있는 사업에 건축가 이일훈이 적극적으로 동참한 사례가 적지 않다. 노숙인의 쉼터이자 문화공간인 민들레 희망지원센터(2010)도 그중 하나이다. 인천시 중구 인현동 골목 안의 작은 집을 리모델링하여 1층과 2층 전면에 작은 기둥을 세우고 차양을 매달아 길에서 망설임 없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한 것과 1층 입구에 발을 씻을 수 있는 세족실을 둔 것이 눈에 띈다. 1층은 컴퓨터실, 도서실, 영화 상영실 등을 배치했고 외부 계단을 통해 오르내릴 수 있는 2층에는 수면실과 휴게실, 빨래방, 샤워실 등을 계획했다. 이 작은 쉼터가 절망의 순간에 방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삶을 다시 생각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볼 수 있는 장소가 되길 희망한 건축가의 마음이 오롯이 전해진다.

민들레 희망지원센터. 길에서 망설임 없이 드나들 수 있는 출입구와 2층 외부 계단. ⓒChin Hyosook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비록 거칠고 질박한 모습이지만 “고단한 현실을 끌어안고 극복하는 모습”과 “삶 껴안기”란 이슈로 우리에게 건축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해줬던 기찻길 옆 공부방(1998)을 만날 수 있다. 2층 다락방 형태의 집들이 1960년대 정취를 풍기던 인천 만석동에 공부방 공동체 운동을 하던 선생들이 꿈꾸는 삶과 잘 맞아떨어지는 집을 위해 건축가는 주어진 환경과 지역민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기존의 맥락을 고려한 재료를 사용하여 건물이 동네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동화되도록 했고, 주변과 소통이 가능하도록 적절하게 창과 틈을 내었다. 1층 아이들 공부방 전면에도 큰 창을 두어 늘 동네를 마주할 수 있도록 했으며, 외부 계단은 앞서 지어진 옆 건물의 형태를 존중하는 태도로 만들었다. 돌출형 패널과 좁은 통로, 그리고 마당을 가진 3층은 마치 동네 골목길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한 모습이다. 처음에는 불편해하던 사용자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건축가의 의도를 조금씩 알게 됐으며, 공동체가 꿈꾸는 삶 속에서 존중과 배려로 인한 불편은 오히려 아름다움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기존의 맥락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간 기찻길 옆 공부방 (2000년 촬영) ⓒKim Chulhyun

지역민의 삶과 주어진 조건을 있는 힘껏 끌어안은 기찻길 옆 공부방(2013년 촬영) ⓒChin Hyosook
이처럼 이일훈의 건축에는 희망과 위로를 건네는 공간, 사회적 건강함이 읽히는 프로젝트가 가득하다. 다음의 프로젝트들은 그것을 증거하는 몇몇 사례들이다. 채나눔을 지속가능한 미래 사회를 위한 해법으로 역설한 우리 안의 미래 연수원(2007), 노동자들의 상처 난 마음을 다스리고 치유하는 공간 부평 노동자인성센터(2010), 땅 작고 예산은 적은 데 미사, 행사, 토론회, 식당, 사무실, 숙소 등 필요 공간이 많은 상황에서도 심장 같은 방(기도실) 하나는 꼭 두고 싶었다는 제주 강정마을의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2016), ‘더 나은 국어교육’을 위해 전국 국어교사들이 오천 원, 만 원씩 29년 동안 회비를 모아 서울 옥인동 작은 땅을 사서 지은 전국국어교사모임 살림집(2018), 그리고 캄보디아의 상황, 기술 경제성을 반영하고 기찻길 옆 공부방과 홍성 홍동 밝맑도서관(2011)의 경험을 더해 제안한 캄보디아 안나스쿨(2019) 등.

부평 노동자인성센터. 특별한 기능에 대한 위화감이 없도록 동네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건축이 첫 번째 주안점이었다. ⓒChin Hyosook

전국국어교사모임 살림집은 대지면적이 협소해 바닥은 땅의 형태대로, 지붕은 지구단위계획의 경사도와 일조사선을 지키며 만들었다. ⓒJo Jaemoo

전국국어교사모임 살림집 내부 ⓒJo Jaemoo

지속가능한 건축을 고민하고 채나눔으로 풍요로운 삶을 얘기하는 우리안의 미래 연수원 ⓒ서삼종
남은 자들의 몫
집이 불편할수록 삶은 훨씬 더 건강해질 수 있다고 믿고 실천하는 이일훈에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자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고, 불편하게 살자고 제안은 했지만 타협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그는 지금 이곳의 문제와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혹은 그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가진 전문성을 통해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전제로 지속가능한 미래를 향한 건축의 출발점에 서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더 중요한 건축의 가치들이 있고, 건축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일들도 많아요. 디자인은 세상의 문제를 건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얘기를 한결같이 들려주던 이일훈은 이제 우리 곁에 없다. 2021년 7월 2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안녕을 고했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 세례명 토마스를 얻은 그를 위해 남은 자들은 인천 숭의동 성당(2020)에서 장례미사를 올리고 건축가의 생전 자부심이었던 자비의 침묵 수도원을 둘러보는 것으로 안타까움과 슬픔을 가슴 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이젠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사람들의 삶을 건축으로 껴안는 것도, 지속가능한 미래 사회를 건축으로 그려보는 것도, 그리고 그가 남긴 건축 유산을 깊이 있게 되돌아보는 것도 모두 남아있는 사람들의 몫이 됐다. (글 정귀원 제대로랩 대표 / 진행 김정은 편집장)

인천 숭의동 성당은 누구나 들어오고 쉴 수 있는 지역 주민에게 열린 외부 공간을 조성했다. ©Roh Kyung

외벽에 사용된 스플릿블록을 내부에 사용하여 내외일체(內外一體), 즉 안과 밖이 같음을 표현하였다. 3개층 높이의 대성전 내부벽면은 다른색상의 스플릿블록을 반복적으로 쌓아 수직성을 강조하였으며, 이는 성경 속 나무에 대한 은유를 표현한다.©Roh Kyung

©Roh Kyung
▲ SPACE, 스페이스, 공간
ⓒ VMSPAC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